98:0.1 (1077.1)멜기세덱의 교훈은 여러 경로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갔지만 주로 이집트를 통해 전달되었으며, 철저히 헬라화되고 나중에 그리스도교화된 후 서양 철학에 포함되었다. 서방 세계의 이상{理想}은 기본적으로 소크라테스를 따랐으며, 이후의 종교 철학은 예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지만, 진화하던 서양 철학 및 종교와 접촉하는 과정에서 변경되고 절충되었고, 이 모든 것은 결국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98:0.2 (1077.2)살렘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활동을 이어갔고, 간헐적으로 등장하던 많은 종파와 제례 집단에 점차 흡수되었다. 살렘 교훈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간직한 사람들 중에서, 견유학파{犬儒學派}는 반드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신뢰를 외치는 이 전도자들은 기원후 1세기에도 로마화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나중에는 새롭게 형성되는 그리스도교에 통합되었다.
98:0.3 (1077.3)상당 부분의 살렘 교리는 서양의 수많은 군사 분쟁에 참전했던 유대인 용병{傭兵}들에 의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고대{古代}에 유대인은 신학적 독특성으로 유명했던 만큼이나 용맹스런 군인으로도 유명했다.
98:0.4 (1077.4)그리스 철학과 유대 신학과 그리스도교 윤리의 기본 교리는 근본적으로, 더 예전에 있었던 멜기세덱 교훈에 간접으로 영향 받았다.
1. 그리스인가운데서살렘종교
98:1.1 (1077.5)살렘 선교사들이 임직식{任職式} 때 마키벤타가 부과하여 맹세했던 서약, 즉 경배를 위한 배타적 회중{會衆}을 결성하지 못하도록 금지하고, 결코 사제로서 활동하지 않으며, 종교적 봉사에 대한 대가{代價}를 받지 않고 오직 양식, 의복, 거처할 장소만 제공받기로 약속하도록 선생 각자에게 요구한 그 서약을 엄격하게 해석하지 않았더라면 그리스인 가운데서 대단한 종교 체제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멜기세덱 선생들이 헬라주의-이전 그리스에 진출했을 때, 그들은 여전히 아담선과 안드족속 시대의 전승을 간직한 민족을 발견했으나, 이 교훈은 그리스 해안으로 점점 더 많은 수가 유입되던 열등한 유랑민 노예 무리의 관념과 믿음으로 크게 변질되어 있었다. 이런 변질로 인해, 피 흘리는 제례가 포함된 조잡한 정령 숭배로 회귀하게 되었고, 하류 계층은 선고받은 죄수의 사형집행을 예식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98:1.2 (1077.6)초기 살렘 선생 영향력은, 남부 유럽과 동방으로부터 소위 아리아인의 침공을 받아 거의 파괴되었다. 이 헬라인 침입자들은, 아리아인 동족이 인도로 가져갔던 것과 유사한, 사람 모습을 닮은 하나님 개념을 들여왔다. 이 개념이 유입됨으로 말미암아, 남신과 여신들로 구성된 그리스의 신{神} 계보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이 새 종교는, 유입되는 미개한 헬라인 종파에 부분적으로 바탕을 뒀지만, 옛 그리스 주민의 신화도 함께 담고 있었다.
98:1.3 (1078.1)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어머니 예찬집단이 지중해 연안을 전반적으로 장악하고 있음을 발견했고, 이 민족들에게 자기네 인신{人神} 디아우스-제우스를 믿도록 강요했는데, 이 인신은 단일신교를 숭배하는 셈족속 가운데 있던 야훼처럼, 그리스의 하급 신들의 만신전 전체에서 이미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운명의 신이 총괄통제한다는 생각을 버렸더라면, 그리스인은 제우스 개념에서 결국 참된 일신교를 성취했을 것이다. 최종 가치를 지닌 하나님은, 그분 자신이야말로 숙명의 심판자요 운명의 창조자여야 한다.
98:1.4 (1078.2)종교적 진화에서 이러한 요인이 초래한 결과로, 올림푸스 산의 무사-태평한 신들에 대한 대중적 믿음이 곧 발달했는데, 이 신들은 신보다 인간에 가까웠고, 총명한 그리스인은 이 신들을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자신들이 창작한 이런 신들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고, 크게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제우스 신을 비롯해서 그의 반신반인{半神半人} 가족에 대해 애국심과 민족적 느낌을 가졌으나, 그들을 공경하거나 숭배하지는 않았다.
98:1.5 (1078.3)헬라인은 사제제도에 반대하는 초기 살렘 선생들의 교리에 너무 젖어있었으므로, 그리스에서는 어떤 유력한 사제계층도 발생된 적 없었다. 심지어 형상을 만들어 신들에게 바치는 것도, 숭배 문제가 아니라 예술 활동에 해당되었다.
98:1.6 (1078.4)올림포스 산의 신들은, 사람의 전형적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을 설명해준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윤리적이라기보다 심미적이었다. 그리스의 종교는, 한 신격 집단이 지배하는 우주를 묘사했기 때문에 유익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도덕과 윤리와 철학은, 곧 신 개념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진보했고, 지적 성장과 영적 성장 사이의 이 불균형은, 인도에서 입증되었다시피 그리스에 위험한 것이었다.
2. 그리스의철학적사고
98:2.1 (1078.5)경시되고 피상적인 종교는 지속될 수 없으며, 특히 그 형식을 조성하고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을 두려움과 경외심으로 채워줄 사제계층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올림포스 산의 종교는 구원을 약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자들의 영적 갈증도 해결하지 못했으며;따라서 소멸될 운명이었다. 이 종교는 생긴 지 1,000년 내에 거의 사라졌고, 그리스인은 민족종교가 없었는데, 올림포스의 신들이 상류 지성인들에게 영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98:2.2 (1078.6)이것이, 동양과 레반트가 영적 의식{意識}의 회복을 체험하고, 일신교를 깨닫는 새로운 각성을 체험하던, 기원전 6세기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서방은 이런 새로운 발전에 참여하지 못했으며;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북부 아프리카도 종교 부흥에 널리 참여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리스인은 굉장한 지적 향상을 이룩했다. 두려움에 익숙해진 그들은 그 해독제로서의 종교를 더 이상 찾지 않았으나, 참된 종교가 혼의 갈급함, 영적 불안감, 그리고 도덕적 절망감에 대한 치료제라는 사실은 감지하지 못했다. 깊이 사색함으로써 --철학과 형이상학으로-- 혼의 위안을 찾으려 했다. 그들은 자아-보전--곧 구원--에 대한 성찰을 버리고, 자아-실현과 자기-이해로 돌아섰다.
98:2.3 (1078.7)그리스인은, 엄밀한 사색{思索}을 통하여 생존에 대한 믿음을 대신할 수 있는 안도감{安堵感}을 얻으려 애썼지만, 철저히 실패했다. 오직 상류층헬라 민족들 중에서도 특히 지성이 뛰어난 자들만이 이 새로운 가르침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옛 세대의 노예 후손인 서민은 종교를 대체할 이런 새 가르침을 받아들일만한 수용력이 없었다.
98:2.4 (1079.1)철학자들은 “우주의 지성”, “하나님 관념”, 및 “위대한 근원”을 가르친 살렘 교리에 대한 믿음의 배경에 거의 모두가 미약하게나마 물들어있었음에도 모든 숭배 형태를 경멸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이 신성한 존재들과 초월유한 존재들을 인정한다는 점에서는 솔직히 일신교에 가까웠으으나;올림포스의 남신과 여신들 전체 무리에 대해서는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98:2.5 (1079.2)5세기와 6세기의 그리스 시인{詩人}들, 특히 핀다로스는, 그리스의 종교를 개혁하려 애썼다. 그들은 그리스 종교의 이상{理想}을 높였지만, 종교가라기보다 예술가였다. 그들은 최상의 가치관을 조성하고 보존하는 기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98:2.6 (1079.3)크세노파네스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가르쳤으나, 필사적 사람에게 친히 아버지가 되기에는 그의 신격 개념이 너무 범신론적이었다. 아낙사고라스는 최초 원인 곧 시초 정신을 인식한 것 외에는 기계론자에 불과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후계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이 미덕이며;건강한 혼이 선{善}이며;잘못을 범하기보다 부당함을 당하는 편이 낫고,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잘못이고, 신들은 현명하고 선하다고 가르쳤다. 그들이 주장하는 기본 미덕은:지혜와 용기와 절제 및 공의였다.
98:2.7 (1079.4)헬라 민족과 히브리 민족 가운데서 종교 철학의 진화는, 문화 진보의 형태를 결정하는 제도로서의 교회 기능을 대조하여 보여준다. 팔레스틴에서는 인간의 사고{思考}가 사제의-통제를 받고 성서에 지배되는 정도가 너무나 강했으므로, 철학과 미학{美學}은 종교와 도덕에 한결같이 잠식되어 있었다. 그리스에서는, 사제와 “신성한 경전”이 거의 전무했으므로 인간 정신은 자유롭고 속박 받지 않았으며, 그 결과로 사고{思考}의 깊이에서 놀랄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개인 체험으로서의 종교는 시공우주의 본질과 실체를 추구하는 지적 탐구와 발걸음을 맞추지 못했다.
98:2.8 (1079.5)그리스에서 믿음은 생각에 종속되었으며;팔레스틴에서 생각은 믿음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스도교가 장점이 많은 것은, 히브리인의 도덕성과 그리스의 사상에서 아주 많이 빌려왔기 때문이다.
98:2.9 (1079.6)팔레스틴에서는 종교 교의가 너무 정형화되어, 더 이상의 발전을 위협할 지경에 이르렀으며;그리스에서는 인간의 사고가 너무 추상화되어, 하나님 개념이 분해됨으로써 범신론적 사변{思辨}으로 변화무쌍한 안개 같은 상태가 되었으나, 브라만 사상가들의 비인격적 무한자와는 전혀 달랐다.
98:2.10 (1079.7)그러나 이 시대의 보통 사람들은, 자아 실현과 추상적 신격을 가르치는 그리스 철학을 파악할 수 없었고 관심도 별로 없었으며;오히려 구원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자신의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인격있는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했다. 그들은 철학자들을 추방했고, 두 교리가 많이 혼합된 살렘 종파의 잔재를 박해했으며, 당시에 지중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신비 종파들의 어리석음에 끔찍하게 빠져들 준비가 되어있었다. 엘레우시스의 신비의식{神秘儀式}이, 올림포스 산의 만신전, 즉 다산{多産}을 숭배하는 그리스 개정판 속에서 자라났으며;디오니수스의 자연 숭배가 번성했으며;이 종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오르페우스 형제단{兄弟團}이었는데, 그들의 도덕적 훈계와 구원에 대한 약속은 많은 이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98:2.11 (1080.1)구원에 이르는 이 새 방법, 즉 감정적이고 열정적인 이 예식절차에 전체 그리스인이 말려들었다. 어떤 나라도, 그토록 짧은 기간에 그런 고도의 예술적 철학을 달성한 적 없었으며;신격을 실질적으로 배제하고, 인간을 구원한다는 약속까지 전혀 배제하면서도, 이토록 진보된 윤리 체계를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바로 이 그리스 민족들이 신비 종파의 맹렬한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때 그랬듯이, 어느 나라도 그토록 빨리, 깊이, 그리고 세차게, 그런 깊은 지적 침체, 도덕적 타락, 및 영적 빈곤의 수렁에 빠지지 않았다.
98:2.12 (1080.2)종교는 철학의 도움 없이 오랫동안 유지되어왔지만, 종교와 어느 정도 일치함 없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그런 철학은 거의 없었다. 철학과 종교의 관계는 생각과 행동의 관계와 같다. 그러나 인간의 이상적 상태는 지혜와 신앙과 체험의 결합된 작용에 의해 철학과 종교와 과학이 하나의 의미 있는 통일체로 결합되어 있는 상태다.
3. 로마의멜기세덱교훈
98:3.1 (1080.3)가족 신들을 숭배하는 옛 종교 형태에서 전쟁의 신{神} 마르스에 대한 부족{部族} 숭배로 발전했기 때문에, 라틴 지역의 후대 종교가 그리스인과 브라만의 지적 체계 또는 몇몇 다른 민족의 더 영적인 종교보다 오히려 정치적 행사에 더 가까운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98:3.2 (1080.4)기원전 6세기에 멜기세덱의 복음이 일신교를 크게 부흥시키는 가운데 살렘 선교사들 중에서 이탈리아에 스며든 자가 너무 적었고, 스며든 자들도 새로운 신들과 신전들로 이뤄진, 급속히 확산되고 있던 에트루리아 사제계층의 영향력을 극복할 수 없었으므로, 이 모든 것은 결국 로마의 국가 종교로 조직화되었다. 이 라틴 부족들의 종교는, 그리스인의 종교처럼 진부하거나 타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 종교처럼 엄격하거나 압제적이지도 않았으며;대체로 단순한 형식과 맹세와 금기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98:3.3 (1080.5)로마의 종교는 그리스로부터 문화를 널리 도입한 데 크게 영향 받았다. 결국 올림포스 산의 신들 대부분이 라틴의 만신전으로 이식되어 합병되었다. 그리스인은 가족 화로{火爐}의 불을 오랫동안 숭배해 왔는데--헤스티아가 그 화로의 처녀 여신{女神}이었으며;베스타는 가정을 돌보는 로마 여신이었다. 제우스는 주피터가 되었으며;아프로디테는 비너스가 되었으며;올림포스 산의 많은 신격이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98:3.4 (1080.6)로마의 젊은이들이 치르는 종교 입문식은, 국가 봉사에 엄숙히 헌신하는 행사였다. 선서와 시민권 부여는 실제로 종교 예식이었다. 라틴 민족들은, 신전과 제단과 성소를 유지했고, 위기가 닥칠 때는 계시를 받고자 했다. 그들은 영웅의 뼈, 나중에는 그리스도교 성자{聖子}들의 뼈를 보관했다.
98:3.5 (1080.7)그리스인의 상당히 지적이고 예술적인 숭배가 신비 종파들의 열렬하고 매우 감정적인 숭배 앞에 무릎 꿇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형식적이고 감동 없는 형태의 종교를 가장한 애국심은 붕괴될 운명이었다. 이 파괴적인 종파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하나님의 어머니를 모시는 신비교 분파였는데, 오늘날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 본부가 있었다.
98:3.6 (1080.8)신흥 로마 국가는 이집트, 그리스, 및 레반트를 정치적으로는 정복 했으나, 그들의 종파, 제례식, 신비의식, 및 신 개념에 역으로 정복당했다. 유입된 이 종파들은 로마 국가 전역에서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계속 번창했으며,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와 시민으로서의 도리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신비의식들을 말살하고 예전의 정치적 종교를 부흥시키려고 영웅적으로 애썼고, 어느 정도는 성공했다.
98:3.7 (1081.1)유일하신 하나님, 즉 모든 초자연 존재를 지배하는 최종 신격 교리를 전파하려고 살렘 선생들이 초기에 시도했던 것을, 국가 종교를 섬기는 사제들 가운데 하나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이야기했으며;이 관념이 그 황제를 강하게 사로잡게 되어, 많은 신전을 세웠고 아름다운 형상들로 신전을 장식했고, 국가적 사제체제를 재구성했고, 국교{國敎}를 다시 세우고 전체를 주관하는 대사제로 자신을 지정했으며, 황제로서 자신이 최고 신이라고 선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98:3.8 (1081.2)아우구스투스를 숭배하는 이 새 종교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유대인의 고향인 팔레스틴을 제외한 제국 전역에서 번창했고 신봉되었다. 그리고 이 인간 신들의 시대는, 공식 로마 종파가 40명 이상의, 스스로-높아진 인간 신격을 명부에 올릴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기적적으로 태어났고 초인적인 다른 속성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98:3.9 (1081.3)진지한 전도자 집단인 견유학파가, 점점 감소하는 살렘 신자 무리의 마지막 저항이었으며, 이들은 거칠고 몰상식한 종교 제례식을 버리고, 멜기세덱의 복음을 담고 있는 경배 형태로 돌아가라고 로마인에게 훈계했는데, 이 복음은 전에 그리스인의 철학과 접촉함으로써 변경되고 오염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견유학파의 주장을 거부했으며;신비의식 제례에 몰입하기를 선호했는데, 신비의식은 개인이 구원받는다는 희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오락과 흥분과 여흥에 대한 욕구 또한 채워줬다.
4. 신비종파
98:4.1 (1081.4)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대다수 사람은 원시 가족 종교와 국가 종교를 잃어버렸고, 그리스 철학의 의미를 납득할 수 없거나 납득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온, 호화롭고 감정적인 신비 종파들로 눈을 돌렸다. 보통 사람들은 구원에 대한 약속--곧 오늘 종교적 위로를 받고 죽은 후 불멸한다는 희망의 보장--을 갈구했다.
98:4.6 (1081.9)프리지아와 이집트의 신비의식은, 신의 아들이(곧 아티스와 오시리스가 각각) 죽음을 체험하고 신성한 능력으로 부활했다고 가르쳤으며, 더욱이 그 신비 상태로 올바르게 가입된 사람, 그리고 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념일을 경건하게 지키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렇게 함으로 그 신의 신성한 본성과 불멸성에 참여하게 되리라고 가르쳤다.
98:4.7 (1081.10)프리지아 예식은 화려했지만 타락했으며;피 흘리는 축제는 이 레반트 신비의식이 얼마나 타락하고 원시 상태였는지 보여준다. 불길한 금요일이 가장 성스러운 날이었는데, 아티스가 스스로 선택해서 죽은 것을 기념하는 “피의 날”이었다. 축제는 아티스의 희생과 죽음을 3일 동안 경축한 후, 그의 부활에 경의를 표하면서 기뻐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98:4.8 (1082.1)이시스와 오시리스를 숭배하는 제례식은 프리지아 종파의 제례식보다 더 세련되고 인상적이었다. 이 이집트 제례식은 옛 나일 신, 즉 죽었다가 살아난 신에 관한 전설의 영향으로 만들어졌는데, 이 개념은 생명 있는 모든 식물이 해마다 되풀이되고, 동면{冬眠}한 상태에 있다가 봄철에 다시 회복되어 자라나는 것을 관찰한 데서 유래했다. 이런 신비 종파 행사의 광포함과, 신성을 깨닫는 “열광”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예식절차의 방탕함은, 때때로 아주 구역질나는 것이었다.
5. 미드라종파
98:5.1 (1082.2)프리지아와 이집트의 신비의식은, 모든 신비 종파 중에서 가장 힘이 센 미드라 숭배 앞에 결국 굴복했다. 미드라 종파는, 광범한 인간 본성에 호소했고, 이전에 있었던 두 종파를 차츰 갈아치웠다. 미드라교는, 레반트에서 모집한 로마 군단의 전도를 통해 로마 제국 전역에 퍼졌으며, 레반트에서 이 종교가 유행한 것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이 믿음을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이 새 종교 제례식은 그전에 있던 신비 종파들보다 훨씬 개량되었다.
98:5.2 (1082.3)미드라 종파는 이란에서 생겨났으며, 조로아스터 추종자들이 격렬하게 반대했음에도 그 고향에서 오래 존속했다. 그러나 미드라교가 로마에 전파될 즈음, 조로아스터의 교훈 중에서 다수를 흡수함으로써 크게 개선되었다. 조로아스터 종교가 후대에 등장한 그리스도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주로 미드라 종파를 통해서였다.
98:5.3 (1082.4)미드라 종파는, 큰 바위에서 탄생하여 용맹스런 위업을 이룩하고, 자기 화살로 어떤 돌을 맞춰서 물이 쏟아져 나오게 만드는 호전적 신을 묘사했다. 홍수가 발생했고, 한 사람이 특별하게 건조된 배를 타고 피했으며, 하늘로 올라가기 전, 미드라가 태양-신과 함께 축하한 최후의 만찬이 있었다. 이 태양-신 곧 솔 인빅투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마즈다 신격 개념이 퇴화된 것이었다. 미드라는, 어둠의 신과 벌인 싸움에서 살아남은, 태양-신 투사{鬪士}로 여겨졌다. 미드라는, 신화에서 신성시되는 황소를 살해한 보상으로 불멸하게 되었고, 하늘에 있는 신들 가운데서 인간 종족을 위해 중재하는 자리로 높임 받았다.
98:5.4 (1082.5)이 종파를 신봉하는 자들은 동굴 또는 기타 비밀 장소에서 숭배했고, 성가{聖歌}를 불렀고, 마술에 사용되는 말을 중얼거렸고, 제물로 바친 동물의 고기를 먹었으며, 그 피를 마셨다. 그들은 매일 세 번 숭배했고, 태양-신의 날에는 특별한 주간{週間} 예식절차를 곁들였고, 12월 25일인 미드라 연중{年中} 축제일에는, 전체 가운데서 가장 공들인 행사를 치렀다. 이 성례에 참여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의 보장, 즉 죽은 후 즉시 미드라의 품으로 들어가고, 거기서 심판의 날까지 복을 누리면서 머문다고 믿었다. 심판 날에는, 신실한 자들을 영접하려고, 미드라의 천국 열쇠가 낙원의 문들을 열 것이며;그 후에는 미드라가 이 땅에 돌아옴으로써, 산 자나 죽은 자나 세례 받지 않은 모든 사람이 멸절될 것이라고 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심판을 받기 위해 미드라 앞으로 인도되고, 세상이 끝날 때는 미드라가 모든 죽은 자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마지막 심판을 받게 하리라고 가르쳤다. 사악한 자는 불로 멸망하고, 의로운 자는 미드라와 함께 영원히 통치할 것이라고 했다.
98:5.5 (1082.6)처음에는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종교였으며, 신자들은 일곱 가지 서로 다른 계층으로 차례차례 입문할 수 있었다. 나중에, 신자들의 아내와 딸들은 미드라 신전 근처에 있는 위대한 어머니 신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여자 예찬집단은, 미드라 제례식과 아티스의 어머니 퀴벨레를 믿는 프리지아 종파 예식이 혼합된 것이었다.
6. 미드라교와그리스도교
98:6.1 (1083.1)여러 신비 종파와 그리스도교가 도래하기 전에는, 북 아프리카와 유럽의 문명화된 땅에서 개인 종교가 독립된 제도로서 발전되는 일이 전혀 없었으며;종교는 오히려 가족, 도시 국가, 정치, 및 제국의 일이었다. 헬라 시대의 그리스인은, 중앙에 집중된 숭배 체계를 발전시킨 적 없었으며;제례식은 지역에 국한되었으며;사제계층이 없었고 “신성한 책”도 없었다. 로마인과 거의 마찬가지로, 그들의 종교제도에는 상류의 도덕적 가치와 영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하여 강력하게 추진하는 매개체가 없었다. 종교가 제도화되면 대개 그 영적 질이 떨어지게 마련이지만, 크든지 작든지, 어느 정도 제도화된 조직의 도움 없이는 어떤 종교도 살아남지 못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98:6.2 (1083.2)회의론파, 견유학파, 에피쿠로스파, 및 스토아학파의 시절까지, 그러나 그중에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교라는 바울의 새 종교와 미드라교가 엄청나게 경쟁을 벌이던 시절까지, 서양의 종교는 그렇게 시들어있었다.
98:6.3 (1083.3)기원후 3세기에, 미드라교와 그리스도교 교회는 외형과 그 제례식 특성에서 무척 흡사했다. 그런 예배 장소 대부분은 지하에 있었고 제단{祭壇}이 있었는데, 제단의 배경은 죄의 저주를 받은 인간 종족에게 구원을 가져온 구원자의 수난을 다양하게 묘사하는 그림이었다.
98:6.4 (1083.4)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성스런 물에 손가락을 적시는 것이 미드라 숭배자의 풍습이었다. 그리고 어떤 지역에서는 동시에 두 종교를 갖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이들은 이 관습을 로마 근처에 있는 대다수의 그리스도교 교회에 들여왔다. 두 종교가 세례를 베풀었고, 빵과 포도주로 성례를 거행했다. 미드라와 예수라는 인물을 제외하고, 미드라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큰 차이점 하나는, 전자는 군국주의를 장려한 반면, 후자는 지나칠 만큼 평화적이었다. (후대의 그리스도교 이외에) 다른 종교들에게 아량을 베푼 것이, 미드라교에 마지막 파멸을 가져왔다. 그러나 두 종교 사이의 갈등에서 결정적 요소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온전한 친교에 여자들도 참여하도록 허락한 것이었다.
98:6.5 (1083.5)결국, 명목상 그리스도교 신앙이 서양을 지배했다. 그리스 철학은 윤리적 가치 개념을;미드라교는 경배 행사의 제례식을;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 자체로, 도덕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보존하는 기법을 제공했다.
7. 그리스도교
98:7.1 (1083.6)창조주 아들이 필사 육신의 모습으로 육신화하고 유란시아 인류에게 자신을 증여한 것은, 화나신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온 인류가 아버지의 사랑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아들신분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쨌든, 속죄{贖罪} 교리를 부르짖은 위대한 주창자도 이런 진리를 어느 정도 깨달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셨다”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98:7.2 (1083.7)그리스도교의 기원과 전파를 다루는 것은 본 문서의 범위가 아니다. 그리스도교가 나사렛 예수라는 인물에 기초하여 세워졌다고 말하는 것으로 족하며, 그는 인간으로 육신화한, 네바돈의 미가엘 아들, 유란시아에서는 그리스도 곧 기름부음 받은 자다. 이 갈릴리인을 따르던 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레반트와 서양 전역에 퍼뜨렸으며, 이들의 선교 열정은 아시아에서 동시대에 살던 진지한 사람들, 즉 불교를 가르친 선생들뿐 아니라, 뛰어난 선구자 곧 셋족속과 살렘 사람들의 열정과 견줄 만했다.
98:7.3 (1084.1)그리스도교는, 한 유란시아 믿음 체계로서, 다음과 같은 교훈, 영향, 믿음, 종파, 그리고 개인의 개별 의견이 복합됨으로써 형성되었다:
98:7.4 (1084.2)1. 멜기세덱의 교훈, 이는 지난 4천 년 동안 발생되었던 서양과 동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 기본 요소임.
98:7.5 (1084.3)2. 히브리인의 도덕과 윤리와 신학의 체계, 그리고 섭리와 최고 야훼에 대한 믿음 체계.
98:7.6 (1084.4)3. 시공우주적 선과 악이 싸운다는 조로아스터교의 생각, 이는 이미 유대교와 미드라교 양쪽에 그 흔적을 남겼음. 미드라교와 그리스도교 사이의 투쟁에 부수적으로 따라온 오랫동안의 접촉을 통해서, 이란 선지자의 교리는, 예수의 교훈이 헬라화되고 라틴화된 개정판에 담긴, 교의와 주의{主義}와 우주론의 신학적 및 철학적 기질과 구조를 결정하는 데 강력한 요소가 되었다.
98:7.7 (1084.5)4. 신비 종파들, 특히 미드라교, 뿐만 아니라 프리지아 종파에서 위대한 어머니 숭배. 예수의 유란시아 탄생에 관한 전설조차, 이란의 구원자요-영웅인 미드라의 탄생이 임박했다고 천사들로부터 미리 전해들은 몇몇 은사-받은 목동들만이 미드라가 이 땅에 출현한 것을 목격했다는 로마 식 기적적 탄생 개정판으로 오염되었다.
98:7.8 (1084.6)5. 요셉의 아들 예슈아의 인간 생애라는 역사적 사실, 영광 받으신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 나사렛 예수의 실체.
98:7.9 (1084.7)6. 다소의 바울이 가졌던 개인 견해. 또한 바울이 소년이었을 때 미드라교가 다소의 지배적 종교였다는 점을 기록해 두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개종시킨 사람들에게 선의{善意}에서-쓴 편지들을, 더 후대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선의로 쓴 그런 선생들의 기록을 후대에 계승한 자들이 이용해 먹은 책임을, 그 선생들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98:7.10 (1084.8)7.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으로부터 그리스를 거쳐서 시라큐스와 로마에 이르기까지 지배했던, 헬라 민족들의 철학적 사고. 그리스인의 철학은, 다른 어떤 현행 종교 체계보다 바울의 그리스도교 개정판에 더 잘 조화되었고, 그리스도교가 서양에서 성공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리스 철학은 바울의 신학과 함께, 여전히 유럽인의 윤리적 기초를 이루고 있다.
98:7.11 (1084.9)예수의 원래 교훈은, 서양 세계로 들어가면서 서양화{西洋化} 되었고, 서양화됨에 따라, 모든 인종과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잠재된 보편적 호소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백인종의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사회관행에 잘 적응된 종교가 되어버렸다. 이는 예수의 종교가 되기를 그만둔 지 오래되었지만, 그 가르침의 방법을 따라 진지하게 추구하려는 그런 개인들에게, 예수에 관한 아름다운 종교를 여전히 용감하게 묘사하고 있다. 예수를 그리스도, 즉 하나님께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라고 미화했지만, 그리스도교는 주님이 친히 전하신 복음, 즉:하나님이 아버지시고 모든 사람은 누구나 다 형제관계임을 대체로 잊어버렸다.
98:7.12 (1085.1)이것이 바로, 유란시아에서 마키벤타 멜기세덱이 전한 교훈에 관한 긴 이야기다. 네바돈의 이 비상대책 아들이 자신을 유란시아에 증여한 지 거의 4천 년이 되었고, 당시의 “엘 엘리온, 지고자 하나님의 제사장”의 교훈은 모든 인종과 민족에게 스며들었다. 그리고 마키벤타는 자신의 특수한 증여 목적을 성취하는 데 성공했으며;미가엘이 유란시아에 출현할 준비가 되었을 때, 남녀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하나님 개념은 오늘날에도 우주 아버지의 수많은 자녀들이 공간의 회전하는 행성들에서 흥미진진한 현세의 생애를 살아가면서 겪는 생생한 영적 체험 속에서 여전히 새롭게 타오르고 있다.